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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어이가 없지. 척 봐도 완전 선머슴인 아란이 여자애라고

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어? 어린아이들이 워낙 성별구분하기 어렵다고 해도, 아란

의 경우는 좀 심한 거야.

아무튼, 그 이후로 아란은 내 상처 치료와 식사수발은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면

서 자신이 쓸모 있고, 나에게 필요하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노력했다. 처음에는

단지 굴욕감을 주려던 나도 감탄할 정도로 필사적이었다.

현재 나이 14세이고, 사내아이 같은 더벅머리에 치마보다는 바지가 백배는 편하

다고 하는 소녀 아란이 지금 나의 노예다.

…여자라는 걸 일찍 알았더라면 아마 조금 다른 처벌을 내렸을지도 몰라.

윌터는 그렇게 성별 알아보는 게 둔하냐고 핀잔을 주었고, 아르사하는 입을 가리

며 작게 웃었다. 윌터의 핀잔에 골이 난 내가 넌 어떻게 알았냐고 말했을 때, 윌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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터의 대답은 상당히 걸작이었다.

“하체에서 피 냄새가 났거든.”

누가 개코 아니랄까봐 자랑하고 있다.

아무튼 아르사하의 말대로 아란은 확실한 쓸모가 있었다. 자신의 할 일을 명확하

게 알고 있었고, 잽싸게 일을 수행한다.

아침에는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세수할 물을 준비하고, 내가 세수하고 이를 닦는

동안 잠자리를 정리한다.

식사를 할 때가 되면 시간 맞춰 내 자리를 봐두고는 음식을 담은 그릇을 대령한

다. 식후에 내 식기까지 알아서 치워간다.

여행을 할 때가 되면 마차 한쪽에 조용히 앉아서 내가 무슨 명령이라도 내리길

기다리고 있다.

야영을 하기 위해 멈추면 얼른 내 몫의 천막을 치고, 잠자리를 준비한다.

나의 편이를 위해서 최대한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, 미워하기가 점점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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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려워지는 녀석이기도 하다.

그럴 때가 되면 아란에게 또 속지 말자고 자신을 가다듬지만, 어차피 아란은 부

족과 자신의 목숨이 인질로 잡혔으니 저항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.

저항할 바엔 차라리 내 노예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겠다는 것 같았다.

솔직히 말해서, 지금은 그다지 죽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.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

는 것과는 달리, 사람을 죽인다는 게 말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.
바보나 어린애, 멍청이들이 사람을 죽이느니 어쩌니 하는데, 동물을 죽이는 것과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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